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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과 만났다] 술을 다시 보다…‘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정지아

아직 배울 것이 많다는 생각에서려나… 뭔가 습득되는 것이 있어야 책을 읽는 의미가 있다는 생각으로, 자잘한 신변잡기를 써 놓은 수필집은 피천득 님의 ‘인연’ 만큼의 아름다운 문장이 아닐 바에는 손에 들게 되지 않았다. 그런데 ‘세 여자’의 조선희 작가가 서울의 낙산 성벽 꼭대기에서 운영하는 카페 ‘책 읽는 고양이’에서의 북토크 참관을 위해 지난 12월에 읽게 된 한 권의 책이 수필에 대한 나의 편견을 불식시켜주었으니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였다.     지리산 자락을 품은 땅 ‘구례’에서 태어나, 60에 가까운 지금까지 줄곧 산 아래 자연을 이웃 삼아 살아온 작가는 우리 역사의 아픈 뒤안길을 몸소 살아낸 친아버지의 이념적 이력으로 하여, 태생부터 빨치산의 딸이라는 운명적인 딱지가 붙혀지면서, 청년이 될 때까지 오랜 세월 남몰래 숨어 산 아픔이 있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믿지 못할 사람 사이의 일을 수없이 겪으면서, 곁에 사람 두는 일에 선을 긋는 일을 인간관계의 본령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다 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수필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은 어떻게든 작가와 사귀려고 애를 써대는지. 내가 만난 사람 중에는 그런 배경을 지닌 사람이 없어서인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를 술에 곁들여 맛깔나게 빚어내고 있었다. ‘내가 죽으면 술통 밑에 묻어줘. 운이 좋으면 밑동이 샐지도 몰라…’라던 일본 선승의 하이쿠가 떠오를 만큼, 전체 수필이 모두, 시바스 리갈과 조니 워커 블루, 보드카와 소주를 기본양념으로 하여 쓰여있다. 내가 이런 술 냄새 진동하는 수필에 감동을 한다고? 믿기지 않을 따름이었다.   제일 강렬하게 남아있는 에피소드는 ‘먹이사슬로부터 해방된 초원의 단 하루’. 아프리카 초원의 사과나무에서 떨어진 사과가 자연적으로 발효되어 사과주가 되었고, 그것을 주워 먹은 동물들, 원숭이나 사자가 각자의 위치를 잊어버리고 거나하게 취해 서로 엉켜 나뒹구는 내셔널지오그래픽의 다큐멘터리를 인용하여 쓴 수필 한 꼭지. 술의 효력 최대치를 더는 맛깔날 수 없게 잘 표현해놓았다.     술을 매개로 하여 쓰였지만, 책 전체에서, 사람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사랑에서만 나올 수 있는 관계, 또 다른 차원의 포용이 뿜어져 나오면서, 근래 보기 드물었던 진짜, 진심, 본질 이런 단어가 뇌리를 감돌던 책이었다.   니체가 말한,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찾아가는 실재성과 정체성에 도달하는 디오니소스적인 측면의 극대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이 한권을 읽으며, 술 대신 그 기쁨에 취해보시기를 권해드린다. 세상의 모든 훌륭한 책이 그러하듯, 첫 페이지부터 엇! 하는 놀라움을 안겨드릴 것이다.     작가가 직접 책에 관해 이야기하던 북토크 때의 모습에서는, 모름지기 작가라면, 기본 소양에 있어서부터 상대방을 포옹하는 그릇이 남달라야 할까. 어느 만큼의 아픔과 극복과 다독의 경지가 저 정도의 책을 써낼 수 있게 할까. 저 두둑한 유머의 경지는 또한 어디에서 오는 걸까. 많은 생각과 삶에 대한 자극이 일게 하였다.     정지아 작가의 손끝에서 펼쳐지는 시대의 온기로, 압도적인 몰입감을 선물한다는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도 꼭 마저 읽어보고 싶어졌다.   어두운 운명의 끝을 부여잡고 음지로 떨어지는 대신에, 보란 듯이 세상의 배에 올라 신나게 항해하는 작가의 비범함, 고요함, 해학, 삶의 두께!! 낯가림이 심한 작가가 사는 구례의 산자락 아랫마을에 오늘도 살뜰하게 나무와 풀과 바람과 인적이 함께 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박영숙 / 시인이 작품과 만났다 정지아 정지아 작가 산자락 아랫마을 아프리카 초원

2024-01-05

[이 작품과 만났다] 그리고 봄 -조선희

‘대통령 선거 이후 1년, 상실과 혐오로 해체되었던 4인 4각 가정사 봉합기’…. 책 뒷커버에 이렇게 그 주제를 적어 놓은 이 책은, 노벨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 이름은빨강’처럼 다자 초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가족구성원 네 사람, 엄마, 아빠, 딸, 아들의 입장에서 각각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아무런 정보 없이 읽기 시작했다면 30, 40대 젊은 작가가 쓴 줄 착각할 만큼, 전개가 빠르고 가볍다. 1920년대 여성 혁명가들의 인생을 다룬 ‘세 여자’를 쓴 작가가 맞나 싶을 만큼 소재도 시대 친화적이어서, 이렇게나 다양한 측면에서 빠르게 세상에 스며들어 그 속을 들여다보고 계셨구나!저으기 놀라면서 책을 읽어 내려갔다. 시작 부분 젊은이들의 방황 이야기를 읽다 보니, 올해 영화 평론가들이 최고의 한국영화로 선정한 ‘다음 소희’라는 영화가 오버랩되기도 했다. 비열한 비양심의 끝판왕 어른들의 세계에 눌려 삶을 놓아버린 어린 청춘을 보며 나도 몰래 눈물이 흘렀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도 가족구성원 각자에게 드리워진 사회의 그늘이 아픈 눈물로 번지려나 다소 조바심이 일었다. 그러나, 이 책은 다행히도 달달한 맛이 살짝 섞인 건강한 눈물 한소끔이 있는 소설이었다.   동성애자에 대한 다분히 보수적인 시선의 나에게는 상당히 거북한 주인공 동성애자 딸 ‘하민’이 튀르키에 여자와 국제결혼을 하겠다고 엄마 ‘정희’에게 폭탄선언을 하는 내용. 또한, 입사지원서를 100번 쓰고 지친 아들 ‘동민’이 말다툼 끝에 기타 하나 달랑 메고 가출을 한 채, 한 방에 훅 뜨기를 꿈꾸며 삼인조 밴드의 가난하고 불투명한 생활을 하는 이야기가 쭉 이어질 때, 내가 이 소설을 잘 따라갈 수 있을지 요즈음의 트렌드에 너무 어두운 나를 책망하면서 지극히 수동적인 자세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나이 서른에 정해진 것 하나 없이 사라져가는 젊음 속에서 꿈과 현실 사이를 방황하는 동민이 그 틈을 어떻게 좁혀가는지를 읽으면서 또래의 내 아들이 세상과 마주하며 겪었을 고민이 교차하여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동성애자 하민의 삶의 해법을 보며, 요즈음 주변에 턱없이 늘어나는 동성애자들을 한 번쯤은 세심히 들여다봐야 하지 않는지 숙제를 받아 안은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네 번째 장, 1959년생인 아버지 ‘영한’의 이야기에서는 한자도 놓치고 싶지 않을 만큼 엄청난 몰입감이 일었다. 이 네 번째 장으로 이 책은 그 역할을 다했다고 할까. 뭔지 온몸에 가득 채워지는 플러스에너지.     삶의 끝자락에서 마주한 육체와 정신의 노쇠, 죽음에 대한 예감을 강건하고도 유머러스한 글과 드로잉으로 담은 양철북의 작가 귄터 글라스의 ‘유한함에 관하여’가 수필 형식의 위로와 해법서라면, ‘그리고 봄’의 4장은 소설로 된 해법서라고나 할까. 씨네 21 편집장과 한국영상자료원장을 지낸 소양일는지, 영화와 문화 전반에 관한 넘치고 빛나는 일련의 예들은 선물로 받은 듯, 밑줄 그어두고 하나씩 찾아보고 싶게 했다. 지극히 가볍게 트렌디한 세상을 훑는 듯 시작하지만, 이 4장의 저력으로, 세대 간 사고의 차이나 코로나19로 조각난 젊은이들의 한숨과 아버지의 갱년기 슬럼프를 단번에 돌아보게 한다. 우리의 유한성을 딛고 일어나 오늘 내게 할당된 의미 한 부분을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채우기로 하자를 표표히 일게 했다.   내 삶의 최애 가치인 ‘역지사지’. 틱낫한 스님의 책, ‘마음에는 평화, 얼굴에는 미소’에서 배운 ‘차를 마실 때는 차만 생각하자’는 책 속 캐치프레이즈도 반가웠다.   우리 다음 세대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정치적 잉여뉴스로 받는 이 엄청난 스트레스는 어찌해야 할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광고카피가 완전히 틀렸음을 날마다 절감하는 인생 후반기에서 그 의미를 찾지 못해 서성인다면, 가족 간의 끈끈함이 얼마나 당연하고도 고마운 현실인지를 뭉근히 느끼면서 이 책에서 답을 찾아보시기를 권해드린다. 박영숙 / 시인이 작품과 만났다 조선희 주인공 동성애자 방황 이야기 가족구성원 각자

2023-12-11

[이 작품과 만났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임윤찬 군

지난 10일, “내일 연주도 티켓이 없다면서…?” 하는 공연장 바깥사람들의 안타까운 토로를 들으며 들어갔던 링컨센터 데이비드 게펜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이 뉴욕 필하모닉과 임윤찬 군의 피아노 선율로 시작되면서 그렇게 숨도 안 쉬듯 몰입된 청중들의 뒷모습은 전에 본 적이 없었다. 서울에서조차 이 공연을 보기 위해 부러 뉴욕에 왔다는 사람들까지, 홀 전체가 미동도 없이 그의 피아노 소리에만 귀를 쫑긋하고 있었다. 초인적으로 드라마틱한 곡 자체의 매력까지 합해져, 40분이 마치 4분인 듯 지나가 버리고, 혼연일체가 되어 우레와 같이 쏟아져나오는 기립 박수 안에 나도 망연자실한 채 서 있던시간!! 그가 이룬 절정은 ‘감격’이라는 단어로는 심히 표현 부족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생기가 돌기 시작한 맨해튼 거리를 달리면서 임윤찬 군의 범세계적인 이 ‘현상’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어느 인터뷰를 보든, 19세 소년에 불과한데도 이미 완성된 듯 베어져 나오는 겸손한 인품. 리스트의 단테 소나타를 잘 치기 위해, 쉽지 않은 단테의 ‘신곡’을 거의 다 외울 정도로 읽었고, 등하굣길에 무려 1000번 이상을 들었다는 오늘의 3번 협주곡 등의 일화가 말해주듯, 그 곡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대치를 위해 최고의 노력을 기울이는 충실함. 그리고는 스스로 그 속에 빠져들어 듣는 이마저 몰입하게 하는 흉내 낼 수 없는 열정!!   어정쩡한 차원의 완성도에 서성이며 끊임없이 원치 않는 타협을 생각해야 하는 안타까운 우리네 인생살이에서 아예 머~얼리 떨어져 있는 그의 세계가 너무 부러워서가 아닐까. 누구나 잘할 수 있는 것이 있고, 그것을 알고 난 후 진정으로 좋아해서, 그곳에 몰입만 할 수 있다면, 그렇게나 엄청난 세계, 자신도 행복하기 그지없고, 듣는 이들도 감동에 전율할 수밖에 없는 세계 속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존 인물 이라서가 아닐까. 사람들 가슴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꿈을 그가 절절하게 실현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잘 살고 있나를 반성하게 해주는 그에게 무한 감사가 보내진다. 내내 건강한 연주자로, 시작과 같이 끝내 담대한 전설로 오래오래 남기를 진정으로 기원해본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으로 전설적인 무대를 남겼던 실존 천재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헬프곳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Shine’에서 이 곡을 들으면서부터 좋아하게 되었고 마침내 제일 좋아하는 클래식 작곡가 중 한 명이 라흐마니노프임에도, 곡 제목이 2번인지 3번인지 늘 헷갈렸던 우매함이 이번 공연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3번이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재학 중이던 윤찬 군은 스승인 손민수 교수가 보스턴 소재 뉴잉글랜드 음악원으로 옮김에 따라, 가을학기부터 그곳에 유학하기로 했다고 한다. 뉴욕 가까이 오게 된 그가 더 많은 시간을 뉴요커와 함께해줄 수 있을 듯하여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그런데, 이번 뉴욕필과의 공연에 숨은 조력자가 계시니, 윤찬 군이 2022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함에 따라, 3년 동안 우승자 콘서트 협찬을 받아 뉴욕필과 협연하게 되었지만, 이 연주회를 후원한 유일한 한인, 미숙 두리틀 님의 조용한 후원에도 큰 감사와 존경을 보내드린다. 나도 행복하고 그도 행복하고 음악을 듣는 이도 행복하게 해주는 그 일을 ‘실천하심’이 쉬운 일은 아님을 잘 아는 까닭이다. 박영숙 / 시인이 작품과 만났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피아노 협주곡 피아노 소리

2023-05-18

[이 작품과 만났다] 남과 북을 사랑한 지창보 선생 회고록 ‘고독과 자유’

“한 사람의 인생은 그 시대의 역사적 주변 사건과 연관되어 계속되는 역사의 거울이다.”     “한 인간은 모든 인간과 존재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인간과 자연, 우주는 서로 엉키어 있다. 나는 그러한 각도에서 나의 존재와 삶을 인식하고 싶다.”     일제 강점기와 남북 분단기가 한 개인의 삶을 얼마나 달라지게 하는지 가감 없이 보여주는 회고록, ‘고독과 자유’의 서문에 나오는 글이다. 뉴욕의 박중련 회계사가 100세 어른, 지창보 교수의 삶에 아름다운 마침표를 찍어드리고자 엮어 지난해 9월, 세상에 나온 책이다.     일제 강점기였던 1923년, 평양 근처에서 태어나, 평양 광성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주오대학 재학 중 학도병으로 일본에 징집되었다가, 해방 후 서울에서 국대안 반대, 보도연맹 등에 참여한 것 때문에 좌익으로 몰려, 우익 서북청년단과의 위험한 운명에 직면하게 되면서, 사상과 정치이념의 대립으로 폭력, 살인, 공갈, 협박이 난무하던 조국을 할 수 없이 등진 채, 1953년에 미국 유학을 떠나와야 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혈혈단신 미국에 와서, 두 미국인 교수의 아낌없는 배려와 사랑 덕분에,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고, 몇 학교를 거친 끝에 롱아일랜드 대학교수로 재직하면서, 시대정신도 함께 하는 일생을 보냈다. 반전운동과 인권해방운동이 고조됐던 1960년대 중반, 그 중심지였던 뉴욕 동부에서, 월남전 반대 운동, 1973년 재미민주한인협회창설 멤버로 활동, 1990년대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재미본부 고문 역임 등, 누구보다 앞장서서 통일 운동견인차 구실을 했다. 1971년, 북미 교포 최초로 알제리를 통해 평양을 방문했으나, 원했던 부모·형제는 못 만나고, 그로 인해 군사정부의 혹독한 감시를 받다가,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4년, 무려 40년 만에 문익환 목사의 장례식 참석을 위해 남녘땅 조국을 밟게 되었다.   이 모든 일상이 드라마틱했을 뿐 아니라, 이응로, 김보현, 김환기, 김창렬, 윤이상, 황석영 등 동시대의 문화인사들과 만나며 접했던 그림, 책, 영화 등 문화적 도모도 인상적이었지만, 그 면모를 잘 알게 해주는 일화는 단연 이것이었다.   일제 말, 탄압과 압력에 항거치 못하고, 학병지원 독려로 친일행위를 하던 육당 최남선에게 “총독부에 매수당해 왔으면 솔직하게 나가 죽으라고 하지, 왜 빙빙 돌려서 말을 합니까? 우리는 절대로 일본을 위해 목숨을 버리지 않겠소!”라고 대중들 앞에서 돌직구를 날린 일화였다. 불의를 보고 참지 못 하는 그 성품이 한 사람을 시대적 회오리 속으로 치닫게 했을 것이라는 짐작이 절로 되는 일화였다.   책은 내게, 우리 조국의 근대사가 단숨에 정리되는 기쁨을 주었지만, 남다른 남과 북에 대한 사랑으로 통일에 대한 갈망이 더없이 크셨을 한 사람이 이제 노쇠하여, 우리 세대 최대 과제인 통일의 문제에서 멀찍이 물러나 계심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건국 이래 최고의 위치에 올랐지만, 극심한 인구감소를 겪고 있는 지금의 대한민국은 오롯이 통일을 통해서만 성장 동력을 받을 텐데 말이다.     지난 1월, 큼직큼직한 창문으로 무심한 겨울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지 교수 댁을 방문할 기회가 되어, 평생 소상하게 그려온 그림 수십 점도 만나보게 되었다. 노구를 이끌고, 아직도 아현동 언덕길을 떠올리며 사랑을 이야기하시는 그 모습에서 나의 100세가 그려졌다. 그 나이까지 생존한다면, 손톱만큼이라도 인류를 위해 내 삶의 흔적을 남겨야 할 텐데…. 박영숙 / 시인이 작품과 만났다 회고록 사랑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재미본부 사랑 덕분 롱아일랜드 대학교수

2023-03-27

[이 작품과 만났다] 영웅의 어머니와 촌부인 나의 차이 -‘하얼빈’ 김훈

“한국 청년 안중근은 그 시대 전체의 대세를 이루었던 세계사적 규모의 폭력과 야만성에 홀로 맞서 있었다. 그의 대의는 동양 평화였고, 그가 확보한 물리력은 권총 한 자루였다. 그는 서른한 살의 청년이었다.”   간결하지만 숨을 멎게 하는 긴장감으로, 액자에 박제되어 있는 역사 속 인물들과 생생히 만나게 해주는 김훈 작가의 신작 소설 ‘하얼빈’을 읽었다. 전작 ‘칼의 노래’나 ‘남한산성’만큼 촘촘하고 빼곡한 서사는 아니었지만, 마지막 후기까지 책을 다 읽었을 때,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린 한 젊은이의 뒤에 남겨진, 세 아이와 부인 김아려의 비참했을 최후가 떠오르면서 어찌나 뜨거운 것이 코끝에 올라오든지, 써보려 했던 독후감을 한 자도 못 쓰고 도서관을 나왔다.   책은 1908년, 일본제국 메이지 천황이 대한제국 황태자, 이은을 접견하는, 우리 역사의 비애를 시작으로, 천황의 업을 받들어 한국 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가 문명개화의 탈을 쓰고 약육강식의 전횡을 휘두르는 악행과 나라 곳곳에서 이에 항거하며 행해지던 조선인들의 자결, 의병 운동 등을 보여준다.     그런 중에, 작은 학교를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며 사냥하는 일을 소일거리 삼아 지내던 청년 안중근이 있었는데, ‘아름다운 솜씨다. 짐승을 쏘기에는 아깝구나’라던 그의 다듬어진 조준 솜씨를 칭찬하는 숙부 안태건의 한마디로, 청년 안중근의 운명이 감지된다. 마음먹는 대로 수많은 조선인을 학살한 원흉 이토를 저격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할 일이라는 믿음 아래, 거사는 말할 수 없이 무거운 사안이었으나 진행은 그 무엇보다도 가볍게 동지 우덕순과 치러버리는 안중근의 면모, 저격 후 체포, 수사와 재판, 판결 과정, 죽음 앞에서도 본명인 안응칠의 이름으로 자기 뜻을 기록으로 남겨 세상에 알리려 했던 한 청년의 마지막을 담담히 적어 내려간다.   “안중근의 빛나는 청춘을 소설로 써보는 것은 내 고단한 청춘의 소망이었다”는 작가의 인생 숙제와 같았던 이 책은, 실재하는 우리 역사의 아픈 속살과 가까이서 만날 기회를 준다.   우리는 결국, 지나온 역사의 발자취를 통해 배우고, 그 안에서 오늘을 그리고 내일을 이어갈 것인데, 정신없이 펼쳐진 자잘한 일들 속의 걱정과 재미에 넋을 잃고 오늘을 살아가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사는 건 아닌지 한번 생각할 계기를 준다. 책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지금도 잊히지 않는 한 장면이 있다. 2011년 즈음, 뉴욕의 한가운데 링컨센터에서, 안중근을 주인공으로 한 한국 뮤지컬, ‘영웅’을 볼 때였다.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를 위해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라고.     사형에 처한 아들에게 보낸 안중근 어머니의 편지가 읽히던 장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면서도 동시에 어떻게 모성을 가진 어미가 저럴 수 있는가 하며 가슴에 멍울이 남던 장면이다.     서울에서는 안중근 의사 순국 113주기인 지금, 10년 전의 그 뮤지컬이 영화화되어 절찬 상영 중이라고 한다. 모성과 애국심 사이에서 도저히 그럴 수는 없다고 서성댔던 나의 감정은, 그때와 지금, 어떻게 변해있을까… 내가 감히 서른 살 내 아들에게 대의를 위해 죽으라고 한마디나 할 수 있을까…. 박영숙 / 시인이 작품과 만났다 김훈 어머니 안중근 어머니 청년 안중근 안중근 의사

2023-01-16

[이 작품과 만났다] 자연과 우리는 하나…가재가 노래하는 곳

 책을 읽고 나면 한동안 그 책의 세계에 빠져 책과 헤어지는 게 안타까운 책들이 있다. 쥐스킨트의 ‘향수’가 그랬고,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가 그랬다. 그런데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읽은 지 한 달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주인공이 누린 완벽한 자유, 야생성을 잃지 않은 한 인간이 자연과 어우러져 풍겨내는 그 과도한 매력에 빠져 다른 책으로 건너갈 수가 없으니 이제는 이 책이 내 사전 최고의 책이 되어버린 것이다.   책은 아버지의 무능과 폭력으로, 여섯살 때 엄마가 곁을 떠나고, 열 살 때는 형제들도 모두 떠나, 외진 바닷가 습지에서 홀로 처참한 가난과 외로움과 차별의 문제에 한꺼번에 노출된 채 살아가는 ‘카야’라는 소녀의 성장소설이면서, 테이트라는 소년과의 사랑 이야기면서, 살인사건이 첨가된 스릴러물이다. 소설의 기본 중에 기본요소인 ‘흥미’ 면에서 그 어떤 소설에도 뒤지지 않으나, 이 책에는 그 어떤 책에서도 맛볼 수 없었던  ‘맑음’이 있다.     그림처럼 눈 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자연, 그 자연과 한 인간과의 완벽한 교감, 우리 인간이 결국 다 같이 하나의 자연이라는 사실, 그리고 계산 없이느릿느릿, 겉치레에 치중하지 않고 내면에만 충실해도 삶은 얼마든지 진화될 수도 행복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조용하고도 품위 있게 알려준다. 그 점에서 비슷한 내용의 다른 통속소설과 완벽하게 구별된다.   책의 작가 ‘델리아 오언스’는 70평생 생태학자의 길을 걷다가, 2018년 첫 소설작품으로 이 책을 발표했다고 한다. 평생을 통한 생태계연구로 비할 데 없이 아름답게 자연을 묘사할 수 있었던 점에 경이에 가까운 존경심이 일었다. 한 가지 일로 뿌리를 내리고, 튼실한 열매를 맺게 하는 삶. 이보다 더 부러운 삶이 있을까…언젠가 그런 습지에서, 문명의 이기와 잡다한 관계들을 뒤로 한 채, 외롭고도 외롭게 꼭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생경한 소원을 갖게 한 이 책은 다만, 최고의 반전이 있는 마지막 부분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주춤거려지기는 했으나, 이보다 더 매혹적으로 자연 친화적인 우리 본래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면서, 나도 모르게 스르르 위로를 받게 하는 책은 글쎄…나의 짧은 독서력 안에서는 없었던 듯하다. 끝나지 않은 코로나의 뭉근한 무게로 앞이 뿌연했으나, ‘바람이 분다…살아봐야겠다…’는 기운을 나도 모르는 사이 얻게 해주었다.     그런데, 드디어, 상상 속의 바닷가가 어떻게 실제 모습으로 드러날지 참으로 기대됐던 영화가 올여름 극장 개봉을 했다. 아. 어찌 감히 책 속의 그 아름다움을 영화가 표현해낼 것이라 기대를 했던 것일까. 이 책을 발굴해서 40주 연속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가 되는 길을 열어주고, 영화로까지 제작한 배우, 리스 위더스푼의 시도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주인공 선정을 시작으로, 어찌나 편편하고 좁은 시야로 영화가 전개되든지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책을 능가하는 영화는 있을 수가 없다는 진리(?)를 새삼 절감하며 책 속에서 품은 나만의 풍광을 더더욱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래도 스토리라인 자체가 튼실하기 때문인지, 나온지 2개월이 지났음에도 영화는 아직 극장 상영 중이다. 박영숙 / 시인이 작품과 만났다 가재가 자연 시야로 영화 바닷가 습지 올여름 극장

2022-09-28

[이 작품과 만났다] 눈 떠보니 선진국

읽어야 할 책들이 수북하지만, 이 책은 제목에서 이미 절반의 승리를 거둔 듯하다.   영국 시인 바이런이 ‘자고 일어났더니 유명해져 있었다’라고 놀라 했던 말에서 차용한 이 책 제목이 요즈음 한국인들의 반신반의하는 자국에 대한 평가에 관한 의구심을 정확히 읽은, 그래서 바로 읽고 싶은 욕구를 던져줬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침, 이번 서울 나들이 때,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이 책의 북 토크가 열려 박태웅 작가의 말씀을 직접 듣게 되었다.   “절대로…소프트웨어 개발 같은 일은 하지 말 것, 꼭 의대에 가든가 공무원이 될 것을 인생 후배들에게 저주처럼 들려주고 있는 한국 사회, 질적인 전환에 맞닥뜨린 대한민국이 지금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일본과 같은 절차를 밟을 수 있다”는 자성론과 작년까지가 대한민국이 전후 100년간의 전성기였다는 위기감에서 책을 쓰게 됐다고 한다.   K 방역, 조선 산업과 반도체 분야의 승전고, 기생충과 BTS, 오징어 게임으로 문화 강국까지 된 마당에도 정치, 사회 전반 시스템, 소프트웨어 생태계가 미숙한 이유를 정확한 제시 대신에, ‘더 열심히, 가열차게 하겠다는 형용사와 부사만을 주창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며, 책 전체에서 구체적인 숫자와 예시로 입증하려 애썼다는 저자는 아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한다.   첫째, 우리만의 근대가 상실된 태생적인 비극 안에서, 조선 시대에 대한 정리나 시행착오나 반성 없이, 거의 모든 문물이 선진 외국에서 도입된 채로 모순 상황의 현대를 맞으면서 주어진 일은 빨리 일구어낸 것에 비해, 그 외의 것들에는 발전동력을 쓰지 않던 중에 달성한 의도치 않은 높은 수치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우리를 선진국으로 올려놓았는데, 인제 와서는 베낄 선진국 대상이 없어져 버린 상황을 인식해야 하고,   둘째, 모든 일이 정착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코너까지 가기 전에는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로서, 청년 정치일꾼을 쓸 때도, 근거에 의존하지 않고 갑자기 데려와서 쓰다가 버리고를 반복하다 보니, 공론화를 거치지 못한 절차로 인한 실패가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있고,   셋째, 낮게 달린 열매는 다 따 먹고 높이 달린 과일만 남은 현 상황에서, OECD 기준 세계 평균 20%인 사회적 안전핀이 12%인 우리 사회는,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없으므로 자기가 누군지를 모르며, 자기가 무엇을 해야 행복한지를 모른 채 가고 있는데, 자존감을 찾고 우리 스스로가 길을 열어가야 함을 제시하고 싶었다고 한다.   책에서 그는, 선진국의 조건에 비춰 볼 때 보이는 한국사회의 결핍사항을 탐색하고, 상생과 합법 속 성숙한 정치적 실천을 외국의 예로 제시하며,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집어삼키고 있는 이 즈음의  AI와 알고리듬의 작동원리에 관한 인식과 실천의 필요성을 IT 전문가다운 숫자와 예시로 알려주고 있다.   온 세계가 노아의 방주를 예상케 하는 거대한 홍수와 폭염에 몸살을 앓고 있는 와중에, 식당과 카페에서 일회용 용기 사용을 금지한다는 우리 대한민국! 거대 선진국에서도 나 몰라라 하는 이 과제를 몸소 실천하는 대한민국, 눈 떠보니 선진국!! 맞지 않겠는가. 박영숙 / 시인이 작품과 만났다 선진국 선진국 대상 정치 사회 시스템 소프트웨어

2022-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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